미워할 수 없는 우리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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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영일

미워할 수 없는 우리들의 대통령

4.19 주역이 말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한국정치에는 아직 미국식 민주정치에서 잘 알려진 ‘건국 아버지’라는 미국의 개념이 들어오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나라 대통령들을 단점이나 흠결 중심으로만 보는 접근 대신에 공헌이나 업적 중심으로 평가하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 공과 과를 동시에 살피고, 국가 지도자를 보는 국민적 시각을 바꿔나가겠다는 기대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이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세움으로써 자칫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할지 모를 위기상황을 극복했고, 북한의 6·25남침에서 나라를 지켰다. 나아가 한미방위조약을 체결,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더욱이 한국발전의 기틀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궤도를 깔아 국가발전의 기틀을 다진 것은 큰 업적이다.
박정희는 중동이나 남미의 독재자들과는 달리 자기 권력을 사적 치부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국력배양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평가받는다. 그는 집권 내내 개발독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통치를 자행했지만 후진국가로서의 한국이 자유와 민주만으로는 이룩하기 힘든 국력배양을 통해 국가로서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를 쌓아 올린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전두환은 민의에 맞서 군을 동원하는 계엄정치 대신에 민의에 순응, 단임 약속을 끝까지 지키다가 백담사 유배와 내란죄로 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단임 공약을 지켰기 때문에 한국정치에서 1인 장기집권의 폐단을 막고 단임제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점도 크게 평가받아야 한다.

목차

들어가면서  · 06

제1편 건국에서 호국으로 …   초대 대통령 이승만
  1 왜 이승만 연구인가  · 022
  2   이승만을 보는 나의 입장  · 026
  3   이승만은 어떤 지도자인가  · 038
  4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다  · 051
  5   이승만의 건국 구상  · 062
  6   유엔감시 자유 총선거와 대한민국의 성립  · 072
  7   대한민국의 건국과 개혁  · 080
  8   한국전쟁과 휴전 그리고 이승만  · 089
  9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나  · 106 
 10  이승만 대통령 어떻게 봐야할까  · 115

제2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도 좋다  박정희 대통령
  1   긍정의 시각으로 본 박정희 이야기 · 130 
  2   4·19혁명의 회고와 5·16쿠데타 상황의 재조명 · 133
  3   4·19 이후 격동의 국내정세  · 139 
  4   5·16쿠데타의 발생  · 157
  5   출옥 후 사회 재적응 노력  · 175
  6   박정희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살펴본다  · 189
  7   국민참여, 국민동원의 개발 행정, 개발 정치  · 197
  8   국토통일원에 간 이영일의 행보  · 214
  9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 안보 철학의 전개  · 224
 10   6·23선언과 대 공산권 문호개방정책의 전개  · 243
 11   더욱 강화된 권위주의 독재체제  · 249 
 12  후대를 위한 국력배양에 헌신한 지도자  · 262

제3편 대한민국을 웅비시킨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1  곁에서 본 대통령 전두환, 인간 전두환  · 270 
  2  전두환 정권과의 첫 인연  · 277
  3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평가  · 304
  4  한미동맹 바탕으로 균형잡힌 대북 접근 · 320
  5  물가안정과 외채극복의 리더십  · 334
  6  최고의 인재 발굴 … 인사 정책에 성공하다  · 344
  7  한국을 웅비시킨 88서울올림픽 유치  · 348
  8  군은 정권의 사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  · 353

글을 마치며  · 358

[책 속으로]

이승만도 반세기 가까운 세월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면서 벌여온 독립운동의 피맺힌 사연들을 해방된 조국의 동포들에게 제대로 알려 자기를 바로 이해하도록 해야 했는데 그는 그러한 노력을 소홀히 했다. 자유민주 체제를 신봉한 분이라도 자기선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더욱이 김일성처럼 자신의 개인 우상화는 생각조차도 한 일이 없었다. … 자기 역사를 왜곡, 조작하거나 허위사실을 첨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_ p.30

해방과 동시에 이승만은 서둘러 귀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은 미 국무부로부터 두서너 가지 일로 미운털이 박힌 한국의 독립운동지도자였다. 이승만은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면 당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승인요청을 했지만, 끝까지 거부당했다. 분개한 이승만은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로비활동을 미국조야를 상대로 적극 펼치면서 미 국무부를 압박했다. … 이승만은 미국이 인정치 않는 대한제국의 여권을 끝까지 보관하고 있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라는 자격으로 귀국하겠다고 국무부에 고집을 부린 것이다. _ p. 49

이승만은 이러한 정세의 흐름을 예리하게 지켜보면서 한반도가 동서냉전에 휘말려 미군 점령지와 소련 점령지에 각각 별개의 국가가 탄생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 상황을 내다보았다. 자주독립은 타당하고 정당한 구호지만 동서 양대 진영 간에 벌어지는 냉전질서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던 사람은 이승만 박사뿐이었다. _ p. 66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3,600명의 국군을 이끌고 “승리하면 군왕이요, 패배하면 역적으로 처형받는다”는 각오로 한강을 건너 수도 서울로 진격, 방송국을 점령함으로써 군부 쿠데타의 제1단계 고지를 점령했다.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무능 부패정권을 타도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건지겠다는 주장이 박종세 KBS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전국,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미군 사령관이던 매그루더 장군과 주한미국대사 마셜 그린은 정당하게 수립된 정부를 지지한다면서 군은 전방에서 방위업무에 전념해야 한다는 성명으로 다른 군부대의 동조를 막고 거사 세력과 반 거사세력 간의 충돌이 몰고 올 내란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상황관리의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_ p. 157

나는 두 차례에 걸쳐 500여 일을 서울 현저동 101번지의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마치고 나왔다. 나 자신이 학문적으로나 시대를 읽는 지식에서 매우 뒤처진 존재임을 깨달았다. 북한에 우리와 같은 대학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경찰과 검찰의 취조과정에서 깨달으면서 남북한학생회담 제안이 한국 상황에 안 맞는 주장임을 스스로 느끼며 좌절했다. 한독당(韓獨黨) 사건에서 무죄로 석방은 되었지만, 권력에 밉보이면 잘잘못을 떠나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구속당하기 십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_ p. 172

한국의 박정희 정권만은 예외였다. 한국 군사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 국가의 뚜렷한 발전목표를 세운 가운데 국가발전에 필요한 외자를 도입했다. 한편 근대화를 주도할 교육훈련, 국민들의 성취동기를 자극할 국민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이 능동적으로 국력배양에 참여할 여건을 조성했다. 물론 이러한 여건을 마련하는 데는 군사정부 수립 이전에 추진되어왔던 준비의 축적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 시절 그 어려운 경제적 조건하에서도 문맹퇴치와 함께 초등의무교육제를 시행했다. 또한 농지개혁을 통하여 농촌 소유형태를 소작농에서 자영농 체제로 개혁했다. _ p. 191

전두환에게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사적 집념은 없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기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라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것이었다고 여러 번 밝혔다. 나는 민주정의당 초대 중앙정치연수원장과 당 총재비서실장을 맡았던 관계로 전두환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독대할 기회도 많았고 주요당직자였기 때문에 여러 간부들과 함께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만날 때마다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자기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고 육군참모총장이 되기 위해 충직한 군인으로서의 생활에 열정을 쏟았다는 것이었다. _ p. 305 

나는 이 순간 연수업무보고 때 전두환이 단임정신을 강조할 때 던진 말 한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단임 정신의 핵심은 체제 내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국민의 화합을 추구할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전두환이 강조하는 단임 정신이 결국 김대중을 살리는 효과를 낳는다고 느꼈다. 전두환도 정국 안정이라는 견지에서 김대중의 사형을 집행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충분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안에서 더 이상 자기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단임 정신을 지키는 원칙의 하나라면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말고나간 것이다. _ p. 314

전두환은 1984년 9월 초 세인이 놀랄 만한 또 다른 결정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 큰 수해가 발생해 190여 명이 사망하고 1,300억 원이 넘는 큰 재산피해가 난 것을 본 김일성이 북한 적십자사회의 명의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 천 50만m의 천,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을 지원하겠다고 알려왔는데, 전두환이 이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꼭 1년 전에 아웅산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를 생각한다면 즉각 거부해야 할 제안이었지만 이를 수락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_ p. 322

이영일

전남 함평군에서 출생(1939)하여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 연구과정을 수료하였다.
일본에서는 츠쿠바(筑波)대학 역사인류학계 외국인연구원을, 중국에서는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 동북아전략연구중심 특약연구원을 지냈다.
제11, 12, 1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남북한고위급회담 한국 측 대표,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장, 민주정의당 전두환 총재 비서실장, 제12대 국회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등 다양한 중직을 거쳤다.
한미정상회담(전두환-레이건) 공식수행, 유럽4개국정상회담(영·프·독·벨) 공식수행, 한중정상회담(김대중-장쩌민) 공식수행, 한중정상회담(박근혜-시진핑) 민간수행 자격으로 정상외교에 참여했다.
국토통일원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통일연수원장, 교육홍보실장(1급), 교육홍보국장 및 대변인,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갑) 등을 맡았다. 사회활동으로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 회장, 한중문화협회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에는 홍조근정훈장을, 1986년에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대십자수교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우즈베키스탄 국립사마르칸드외국어대학에서는 명예정치학박사를, 한국 호남대학교에서는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분단시대의 통일문제』, 『80년대와 한국정치』, 『햇볕정책의 종언』 등이 있고 역서로는 『FRED I’kle의 협상의 전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