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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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이규진

“사월의 라일락이 담벼락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 간판까지 닿아 있었다. 꽃냄새 가득 담은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초저녁 풍경에 취했던 것인지도. 석진은 하얀 뺨을 가진 그 여자가 어쩐지 사랑스러웠다. 말도 못하는 그 여자가.”

 <안녕, 라일락!>은 이규진 작가가 5년 만에 내는 두 번째 소설이다. 전작 <파체>가 조선 정조 연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팩션인데 비해 <안녕, 라일락!>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상 이야기로 가득 채운 판타지이다. 

작은 꽃가게를 하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과 그 앞에 나타난 초절정의 꽃미남록커,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인연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가주된 스토리이다.

이 책에는 어여쁘고 애틋한 것들이 넘쳐난다. 수줍음 많은 소년과 명랑한 소녀,아름다운 남자와 그의 연인들, 잊지 못할 첫사랑의 기억, 인간을 돌보는 천사, 천사보다 더 천사 같은 사람들,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 그런 고운 것들이 얇고 투명한 보랏빛 천에 감싸인 채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목차

천국보다 낯선 006
크리스마스의 이방인 020
사랑할수록 030
버킷 리스트 043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049
아마도 그건 056
붕어빵과 스마트폰 065
페퍼민트 커피 075
그대, 꽃길만 걸어요 083
퍼플, 이터니티, 러브 090
스타 탄생 103
그 사람 이름은 113
보호자 126
뮤즈 137
나의 아름다운 꽃가게 145
이달의 운세 157
언포겟터블 168
나무의 꿈 179
심퍼시 192
라일락 창가 199
인어공주를 위하여 207
데이지꽃 223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229
달의 뒤편 243
유령의 아들 257
누굴까, 그 여인 267
You must believe in spring 273
파 드 되 284
만약에 어느날 296
메모리 303
사랑의 기쁨 313
플로라 다니카 323
그 어떤 행운 332
기억의 저편 341
가을날의 동화 349
죽지마, 떠나지마, 내 곁에 있어 줘 357
천국의 프롤로그 369
Après un rêve 381
선물 394
안녕, 라일락! 403
작가의 말 420
도움을 받은 책들 423

[책 속으로]

그때 블루진을 입은 날렵한 사내가 걸어 왔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가지 않게 생겼는데 온몸에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석진!” 
“누구세요?”
“나? 내가 누굴 거 같아?”
남자는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천국보다 낯선’ 중에서, p.6)

석진은 일락이 작은 꽃을 귀에 꽂고 일하는 게 귀여워 사진을 찍었다.
“왜 도촬해요?”
“눈앞에서 찍었는데 무슨 도촬? 아빠가 아들 찍는 건 도촬이 아니야. 육아일기 같은 거지. 아빠가 영원히 널 기억하려는 거야. 오… 방금 그 자세 멋지다. 프로페셔널하다, 우리 일락이!”
일락은 픽! 하고 웃었다. 저렇게 찍어놓고선 보여주지도 않는다. 비밀이라나. 스마트폰 암호도 꼼꼼하게 걸어놓고 자기만 본다. 어련하시려고. 하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비밀스럽지 않은 게 없는 사람이니. 
(‘그대 꽃길만 걸어요’ 중에서, p.86)

그 여인은 일락의 가게에 남자친구에게 프로포즈할 꽃을 사러 왔었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주제로 일락이가 보라색 꽃들로 꽃다발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했다. 희한하게도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꽃들은 보라색이 많았다. 보라색 장미, 보라색 리시안셔스, 보라색 히아신스, 보라색 스타치스, 보라색 비단향꽃무, 거기에보라색 튤립까지. 
(‘퍼플, 이터니티, 러브’ 중에서, p.99)

“라일락 씨.” 
“라일락 씨이~”
운전면허 학원 접수처 직원이 연신 일락의 이름을 불렀다. 
일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변 사람들이 다 라일락이 누군지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일락은 순심의 옆구리를 찔렀다.
“네가 대신 좀 갔다 와.”
“야, 그럼 양순심 부르면 네가 갔다 올 거야?”
이렇게 공중 장소에서 이름이 불리면 말린 대추처럼 쭈글쭈글해지는 일락과 순심이었다.
(‘그대, 언제나 내 곁에’ 중에서, p.123)

그때 정민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었다. 
“할아버지 병원… 그거 너 해. 대신 석진이 나 줘.”
순간 지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탐미주의자 서정민. 늘 침착하고 조용하던 그가 석진을 만나면서 변해가고 있었다. 음악을 다시 시작했고, 자주 웃었으며, 훨씬 친절해졌다. 그의 변화는 바람직하고 좋은 것이었지만 지연은 어쩐지 불안했다. 
(‘언포겟터블’ 중에서, p.177)

석진의 가슴에 화살촉 같은 별똥별이 무더기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따끔따끔하고 쓰라렸다. 뭔가 말을 해야겠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 수 있다는 건 그 소원이 늘 가슴 속에 있다는 얘기였다. 아빠가 돌아오는 것이 일락의 오랜 소원이었다는 것이 석진의 마음을 아프게도 기쁘게도 했다. 눈가가 축축해졌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가 멍해지더니 이내 밤하늘의 별들이 소리를 내며 일락과 석진의 주위를 돌았다.
 (‘나무의 꿈’ 중에서, p.188)

형형한 눈빛과 인자한 미소를 지닌 노신사는 말로써 석진을 푹푹 찔러댔다.
“자네, 외양이 몹시 훌륭하군. 어째서 우리 아이들이 자네에게 빠져들었는지 납득이 가는군 그래. 미남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 허나, 지연이야 그렇다 쳐도 정민이를 넘봐선 안 되지.”
정민이를 넘봐선 안 되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석진은 귀밑까지 달아오르는 모욕감을 느꼈다. 귀한 집 도련님을 꾀어낸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달의 뒤편’ 중에서, p.248)

“흠… 그건 그래. 그럼 뭐라 부르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없고…”
일락이 심각한 얼굴로 호칭문제를 고민하자 태오도 고충을 털어놓았다.
“형을 형이라 할 수 없으니…”
그러고 둘은 “길동아~!” 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순심이는 그걸 보면서 또다시한심해했고.
(‘유령의 아들’ 중에서, p.259)

“아무튼 그때 좋았어. 너하고 음악 하는 것도 좋았고 니가 속 썩이는 것도 재미있었어. 너 돌보는 거 좋았으니까. 너 처음 봤을 때… 아, 진짜 놀랐었지. 사람이 저렇게도 생기는구나.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얼굴이었잖아. 볼 때마다 달랐어.
소년의 긍지, 여인의 관능, 어린아이의 수줍음과 맹수의 난폭함, 순진하고 얌전한듯하다가 어느 날은 도발적이기도 하고. 신이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지 싶은,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얼굴이었어. 나중엔 우리 아버지의 피아노 소리까지 들리는 것같더라. 아름답고 쓸쓸한, 아직 여름이 오기 전의 밤바다 같은 그런 느낌…”
언젠가 정민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건 필연적으로 쓸쓸한 것이라고. 
(‘You must believe in spring’ 중에서, p.282)

“근데 아빠, 내 생각엔 말야. 그 아줌마랑 아저씨는 나름대로 사랑하며 산 거 같아. 그랬으니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 아니야? 사랑은 말이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는 게 더 중요하대.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살 수 있대. 사랑받고 있는 건 사랑받고 있는 건 모를 수 있지만, 사랑하는 건 자기가 알기 때문에 그 힘으로 사는 거래.”
“누가 그래?”
(‘사랑의 기쁨’ 중에서, p.320)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또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일락도 잠이 들었다. 석진이 꾸는 꿈을 일락이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깨지 않는 꿈속인 것도 같고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도 같은 시간들이 지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새벽이 밝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락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일락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을 뜨면 무엇을 보게 될지. 감은 눈에서 눈물만 흘러내렸다. 처음엔 소리 없이 울다가 다음엔 끅끅 숨을 삼키며 울었다. 그러다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Après un rêve’ 중에서, p.385)

“아니 슬퍼. 여전히.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굳이 슬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기쁨이 그러하듯이.” 
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선물 가져왔는데 안 궁금해?”
“전 아저씨한테 드릴 게 없는데요. 선물은 주고받는 거잖아요. 지난번에 사주신 옷이랑 구두 값도 못 갚았는데… 그리고 커피 잔 값도…”
여전히 낯가림하는 일락이었다. 정민은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다. 그래도 좋았다.  
(‘선물’ 중에서, p.397)

이규진
 

2014년에 <파체>를 냈고 <안녕, 라일락!>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상상할 때가 제일 재미있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꿉니다.